![]() 1980년대 중반 이후 예술의 장르를 막론하고 기존의 관습적 방법론에 대항하는 반동으로서의 방법론의 등장이 이 시대를 표상하게 되었다. 문학, 회화, 무용, 그리고 조각이나 행위예술에 이르기까지 혼돈의 시대에서 새로운 일상성 표현의 질서체계를 구축하려는 모색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던 이들의 돌발적 행위가 건축계에서는 새로운 공간구성의 실험을 추구하는 기운으로 파급되었고, 급기야는 비평가들에 의해 해체주의(Deconstructivism)라는 하나의 커다란 줄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현대건축가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체주의 추종자로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프랑스의 미국문화원을 깡통을 잘라놓은 형태의 연속적 접합 형태로 설계함으로써 프랑스 건축계에 "무서운 아이(enfant terrible)"로 회자되는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와 이라크 출신의 영국 국적을 가진 여성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M. Hadid)를 꼽을 수 있다. 1950년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태어난 자하 하디드는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건축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1971년까지 그녀는 베이루트에서 수학을 공부하였으나 그후 영국의 건축학교인 AA School을 1977년에 졸업하며 런던에서 한때 개인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어 AA School의 선배이자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를 창설한 2인의 건축가 렘 쿨하아스(Rem Koolhaas)와 젱겔리스(Zenghelis)의 문하에서 1979년까지 근무한 뒤 1979년에 자신의 사무소를 독자적으로 개설하였다. 이와 함께 1980년부터는 AA School에서 디자인 디렉터로 학생을 교육하기도 하였으며, 이때 홍콩의 Peak Club 현상설계(1982년)에서 1등을 하며 건축계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 일을 기화로 그녀는 1987년의 아자부 주방 프로젝트(동경), 1989년의 삿포로 레스토랑 인테리어 디자인 등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공간해석과 방법론을 세인에게 각인시키며 실로 해석하기 난해한 공간구축 작업을 계속하게 된다. 1993년에는 독일의 비트라소방서를 완성하였으며, 세계의 건축전시장이라 불리는 베를린의 집합주택의 완성을 보게 된다. 이어 그녀의 작품성향으로는 감히 당선되리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영국 카디프만의 오페라하우스 현상설계에 1등으로 당선되며 1982년의 Peak Club 현상설계 때의 놀라움을 재현하기도 하였다. 1994년부터 하바드와 콜럼비아에서 건축설계와 강의를 담당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그녀의 많은 계획안들이 하나하나 완성되며 지금은 세계적인 대도시의 구석구석을 메워가고 있으며, 유명 건축 전문잡지들은 연이어 그녀의 건축세계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건축역사가이자 이론가인 케네스 프램프턴(Kenneth Frampton)은 "그녀의 건축공간은 무한대로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작품성을 서예로 친다면 달필의 그 맛"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이처럼 그녀의 건축이 세상에서 성공으로 치부되는 까닭은 "매우 새로움의 파급"인 동시에 이를 뒷받침하는 뛰어난 회화성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건축작업은 흔히 아이디어를 집대성하는 드로잉, 아주 자그마한 가구까지 샅샅이 그리는 렌더링, 그리고 이를 에워싸는 표피로서의 건물만들기로 구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삿포로의 레스토랑에서는 두 번째가 가장 잘 표현된 건물로 알려지고 있으며, 1992년의 뒤셀도르프 미디어 센터는 위의 "3단계가 결합한 자극"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녀의 건축공가 만들기나 작업의 수순, 혼돈속의 질서구축을 위한 실험 등은 건축이 오브제로 독립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보면 많은 한계와 함께 현실에서의 장애가 있을 수 있고, 삿포로의 레스토랑 이후 한동안 그녀의 건축작품이 현실적으로 지어지지 못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일례로 베를린 재건운동의 하나로 추진되었던 베를린 국제건축전(IBA 1987)의 하나로 설계되었던 집합주택(social logement)은 독일이 도시계획법에 의해 초기 설계안의 상당부분이 변경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설계자인 자하 하디드 스스로 그 작품을 자신이 설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정도의 왜곡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런 까닭에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1995년의 현상설계에서 당선안으로 확정된 카디프 오페라하우스의 설계에 대해서 그녀는 "도시설계에서 흔히 동시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가치라고 일컬어지는 기념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추구하였다"고 프랑스 건축잡지인 l'architecture d'aujourd'hui 298호에서 술회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성은 관찰자로 하여금 시각적 긴장과 경외심을 갖게 하는 형태적, 공간적 유인력의 응집이라 할 수 있으며, 평면과 입체의 구성을 통해서는 기존의 상식적인 방법에서 탈피하는 추상적 경향을 보인다는 점으로 꼽을 수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기하적 형태의 해체를 통한 요소의 재집결과 축으로의 수렴, 추상적 조각물의 조합 등을 통해 모호함(ambiguity)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프랭크 게리의 작품과 더불어 흔히 '사회적 프로그램이 결여된 건축'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이 일상성을 이탈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로 인하여 많은 관찰자가 새로운 충격과 이에 따른 유인력을 가진다고 할 때, 우리가 딛고 서있는 이 시대의 여러 가지 층화된 문화현상 가운데 하나의 단층을 건축적으로 구현하는 대중문화의 대변인이기도 한 것이다. ![]() 건축의 노벨상. 세계의 가장 일류의 건축가 상이고 그 월계관이라 할만하다. 프리츠커 건축상은 1979년 하야트 재단(Hyatt Foundation)이 매년 재능(talent), 전망(vision) 그리고 품질과 위임의 조합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건축가를 표창하기 위해 재정한 상이다. 그것은 건축예술을 통하여 인류와 건설된 환경에 일관되고 중요한 공헌을 해왔다. 이 상은 건축의 가장 권위있는 상이고 "건축의 노벨상"이라고 불린다. 이 상은 시카고에 본부를 둔 국제적 사업가 집단인 Pritzker 가족(family?)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그들은 오랫동안 교육, 종교, 사회 복지, 과학, 의학, 문화적 활동의 지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내 Cindy와 상을 창립했던 Jay A.Pritzker는 1999년 1월 23일에 죽었다. Pritzker의 장남 Thomas J. Prizker는 하이야트 재단의 장이 된다. 토마스 J. 프리츠커는 이렇게 말했다. "Louis Sullivan,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Mies van der Rohe 등과 같은 건축적 위인들에 의해 디자인 된 건물들 에 둘러쌓여 있는 시카고에서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건축에 대해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있다. 1967년에 the Hyatt Regency Atlanta에 비완공의 건물이 접수되었다. 그 건물의 급상승하는 아뜨리움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세계에서 우리 호텔의 주요한 signature가 되었다. 이 디자인은 우리 직원과 손님들의 태도에 명백하게 영향을 끼쳤다. 시카고의 건축은 우리들에게 건축예술에 대한 지식을 주었고, 호텔을 디자인하고 건설하는 일을 통해 건축가들이 인간 행동을 결정할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1978년에 살아있는 건축가들에게 영예를 주고자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Cindy와 Jay A. Pritzker는 이상이 건축물의 더 공식적인 알림뿐만 아니라 건축가들에게는 더 큰 창조적인 영감을 주는 의미있는 상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가족의 노력을 이어가는 것에 대해 자랑으로 여긴다고 덧붙였다. 프리츠커상의 운영 절차와 상금은 노벨상의을 모델로 했다. 프리츠커 건축상의 수상자는 $100,000(1억2천쯤 되나?)의 상금과, 표창장과 1987년부터는 청동 메달을 받게 된다. 그 이전해에는 한정적으로 제작된(limited edition) Henry Moore 조각을 각 수상자에게 주었다. 모든 나라, 정부, 작가, 비평가, academicians, 동료건축가, 건축 사회 또는 기업경영자, 실질적으로 더 나은 건축에 흥미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서라도 후보를 추천받는다. 이 상은 국가, 인종, 경제, 종파, 이념 등에 차별이 없다. 후보 선출방법은 매년 1월에 마감하며 연속적이다. 마감후에 추천받은 후보자는 자동적으로 그 다음해에 고려대상이 된다. 현재까지 47개국의 500명이 넘는 사람이 추천되어 있다. 마지막 선택은 국제 배심원들에 의해 비밀리에 투표에 의해 선정된다. 프리츠커상 공식 홈페이지 http://www.pritzkerprize.com ![]() 가운데 보이는 Frank Lloyd Wright가 설계한 고층타워를 에워싼 배치계획입니다. ![]() 뮤지엄이 10개의 깔대기 모양의 구조에 의해서 지지되는데 여기에 식당, 로비, 가게 등이 들어가게 됩니다. ![]() ![]() ![]() 그의 작품은 동화적이면서도 유쾌하기까지 하다. 나에게 마치 장난을 걸려는듯이 느스레를 떨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마치 낙서하듯 자유스러운 그의 붓놀림이 마치 장난스럽기까지 하다.. 그러한 장난스러움의 절제가 이러한 유쾌함을 연출하는것일까..? ![]() 스위스의 화가. 출생지 : 스위스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 주요작품 : 《새의 섬》,《항구》,《정원 속의 인물》,《죽음과 불》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 출생.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이다. 어려서부터 회화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바이올린 솜씨는 전문가 수준이었다. 21세 때 회화를 선택한 후에도 W.R.바그너와 R.슈트라우스, W.A.모차르트의 곡들에 심취,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98~1901년 독일의 뮌헨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세기 말의 화가 F.슈투크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초기 제작은 모두 어두운 환상적인 판화가 많으며 W.블레이크, A.V.버즐리, L.F.고야 등의 영향이 짙다. 1911년 칸딘스키, F.마르크, A.마케와 사귀고, 이듬해 1912년의 ‘청기사’ 제2회전에 참가하였으나 1914년 튀니스여행을 계기로 색채에 눈을 떠 새로운 창조세계로 들어갔다. 1921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교수, 후에 뒤셀도르프 미술학 교수가 되어 1933년까지 독일에 머물렀다. 당시 독일에서는 나치스에 의한 예술탄압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로, 102점에 이르는 작품을 몰수당하자, “독일은 이르는 곳마다 시체냄새가 난다”라 말하고 스위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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